제목

함섭 작품에 대하여

이름

마르끄

한국 풍물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이 서울시내 곳곳을 관광할때, 전통 한지를 파는 인사동사거리 가계 선반 앞은 그냥 무심히 지나칠 수가 없는 곳이 된다. 얼핏보기에 허름해 별 볼일 없을것 같은 이들 가계 문턱을 들어가는 순간, 그는 선반, 책상위 그리고 바닥에 겹겹이 쌓여있는 부드럽고 천처럼 유연한 큰 한지 두루마리들이 있는 아주 특이한 세계를 거기서 보게된다.
아주 전문적인 종이 제조인들에 의해 서울에서 먼 지방에서 제조된 이 전통 한지들은 이곳 서울의 관심있는 상인들에 의해 사고 팔아진다.
나무껍질에서 채취한 섬유질을 갖고 만드는 이 한지 제작법은 천년의 역사를 갖고있다. 극동문화(중국. 한국. 일본)의 정수인 이 한지는 두께, 텍스츄어가 다르고 색깔도 정교하고 풍부하여 이 종이가 갖는 다양성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것이 무엇에 소용이 닿는 줄도 모르면서, 진열된 이 아름다운 종이들을 바라보고 만져본 사실만으로 서구관광객은 이 한지를 소유하고 싶어하고 또 그곁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오랜 옛날부터 이 한지를 식별해 생활속에서 사용용도에 따라 종이를 선택한다.
이들은 한지를 집안의 문이나 창을 바르는데 쓰기도하고, -이는 바람을 막거나 들어오는 빛을 은은하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
- 필기용으로 평범하게 사용되기도 하며 서예가에 의해 붓글씨를 쓰는 예술적인 재료로도 쓰인다. 현대에 우리들은 누구나가 부드러움을 띤 흰색 한지위에 그려진 수묵화의 걸작품들을 알고있다. 한국화가들은 이 한지위에 별 어려움없이 유동적인 선과 점진적인 톤의 변화를 통해 아주 심오한 검은색까지 낼 수 있는 수묵화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한국 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 가장 숭고한 이들의 정신을 표현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재료로서 이 한지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판단은 아직도 유용한 것일까? 이면에서 어떤 이들은 새롭게 그들의 근원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과거에 한때 존재하다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향수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속에서 자신을 보려는 생각에서이다.
나는 내 친구 함섭의 작품에 대하여 이글을 쓴다. 그의 인간됨과 미술탐구의 발전경위를 생각하며 떠오르는 하나의 의문이있다. 일반적인 화가로서 함섭을 이야기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차라리 내 눈엔 이제 한지 작가가 된 그를 이야기해야 할것인지의…
80년대 초부터, 함섭은 붓과 아크릴을 이용한 캔버스 작업을 포기하고 그의 진정한 내적 요구에 부응하는 막 발견한 새로운 재료에 전력으로 심취하였다. 그에게 있어 하나의 약속으로서 이 새로운 매체는 흔한 한지에 불과했다. 이로서 함섭은 한 과정을 지났고 그가 내게 최근에 털어 놓았던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새로운 탄생이었다.
일반적인 캔버스 작업에서처럼 함섭이 한지에 그림을 직접 그리는 것을 한번도 본 일이 없다. 그의 한지 사용법은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는 한지가 고유하게 소유하고 있는 색감과 재질감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 자신의 회화적 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주저함없이 각종으로 염색된(빨강•노랑•파랑…) 값비싼 한지들을 쭉쭉찢어 너풀거리는 천 조각들처럼 되어버린 종이를 한줌 손에들어 물속에 담갔다가 역시 밑에놓인 젖은 한지판에 던져 원하는 형을 추구한다.
완전하게 제조되었던 종이로서 한지, 그의 작품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기전 함섭은 한지들을 완전 파괴시켜 버린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이 재료가 갖고 있는 재질의 본질을 느껴보기 위해 한지를 그의 애초의 형태에서 해방시키려는 의식적인 시도 일 것이라고 난 추측해본다. 왜냐하면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만이 상상력을 촉발하는 재질감을 마음대로 사용, 작품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한지는 물속에 담기는 과정에서 잠시동안 애초에 섬유질로 부터 추출되어 만들어졌던 때의 형태가 없는 재질과 아주 흡사한 상태로 된다.
현대미술의 발견중 하나가 모든 종류의 재질감이 갖는 언어성에 대한 개념이라고 난 생각한다. 함섭은 바로 현대작가로서 이 메세지를 잘 포착한것 같다. 함섭은 바탕종이로 두껍고 견고한 한지를 사용하고 때때로 그 크기도 대형의 것을 사용한다. 전적으로 변형될것이 요구되는 바탕종이 위에 작가는 물속에서 건져낸 색종이 조각들을 조금씩 정확하고도 재미있게 붙여 나간다. 자신의 회화적 공간을 건축가처럼 구축해 나가는 작가, 함섭의 제작태도는 열정적이다.
손의 율동이 마치 자신의 온 육체를 이용해 춤을 추듯 -그것은 그의 작품속에-그대로 전달된다. 작품속에 내재한 이 리듬은 여러색면 사이들을 가볍고 경쾌하게 날으는듯 목탄으로 그은선과 붓으로 그은 듯한 선들의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이곳저곳 운동감을 강조하면서 서로 겹쳐 나타나기도 한다. 몇주 또는 몇달이 걸릴 수 있는 한 작품의 제작기간동안, 작가가 열정적으로 또는 비약적으로 되기도하며 침체되기도 하는 사이, 색깔들은 배어들어 점점 그 농도가 깊어져간다.
작품 바탕이 되는 두터운 한지위에 겹겹이 엉겨붙은 한지들의 질감은 그원형판 종이를 덮어 그것과 혼연 일체가 된다. 그것은 때때로 여기저기 원형판 한지 밖으로 삐져나가 종이 가장자리가 들쑥날쑥한 움직임을 따르기도하고 또는 조용하게 그 움직임을 갈아 앉히기도 한다. 작품이란 그의 내부로부터 다른 외부세계를 향해서 변해가는 한계성을 결정하는 생성의 과정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병행해서건 겹쳐서건 여러겹으로 연속해서 붙인 한지의 재질감은 결국 견고한 면을 형성하게 된다. 이단계에서 작가는 아주 단단한 솔을 사용, 아직도 물이 배어 다루기 쉬운 종이판 표면을 여기저기 힘차게 두드린다. 이때 들리는 소리는 내게 언제나 한국의 북을 두드릴때 울리는 소리를 연상케 한다. 작가는 이렇게 해서 부조적 효과를 갖는 텍스츄어를 화면에서 얻게된다.
어쩌면 작품이 완전히 습기가 제거되어 완성되었을 때 모습이 통나무의 벗겨진 나무껍질의 상태에 비교될 수 있는것은 이 방법 때문일 것이다. 이 부조적 효과는 가볍고도 견고한 오브제로서 순간적으로 거치른 표면에 떨어지는 빛을 흡수해 드리기도 한다.
작업과정중에 부쳐진 색지들의 색깔들은 끊임없이 변해가는데 이는 젖은 색종이 조각들이 천천히 원형판 위에서 말라가며 그색깔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미있는 한색이 작가의 시각에 포착된다. 젖은 색종이를 사용하는 순간 마른후에 변해질 색깔을 염두에 두어야하는 함섭에게 있어 이 작업은 위험하나 역시 흥미롭기도한 색의 모험이다.
함섭은 모든것에 앞서 색채화가이다. 우선 함섭 작품의 색채에 대해 이야기 했어야만 했을 것이나 울림을 통해 메세지를 우리에게 전하는 시각적인 실체를 이야기하기 위한 단어들이 부족하다.
함섭의 색채의 세계는 자주 내게 한국의 어느 고찰에있는 색깔들을 생각케 해준다. 탱화 나 프레스코로 그린 벽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주 은은하게 바랜, 그로해서 마치 바탕 종이속에 색지의 색깔들이 스며들어 버린 것 같이¬, 서울 근교에 있는 산속길을 걷다가 굿을하던 당시 눈에 거슬릴 정도로 선명했을 도발적이기까지한 색깔이¬, 몇주일동안 햇볕과 비바람에 삭혀져 그색의 기본적인 색감만 남아 나무가지에 걸려있는 천조각의 색들도 그의 작품속에서 연상케 해준다.
현대 예술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흐름의 전통 한국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아주 새롭고 놀랍기까지 한 독특한 형태의 표현방법이 드러나 있다. 동북아시아의 그림들에 익숙해 있는 서구의 지식인들도 이런 화풍의 그림들에서 과거와 현재간의 연속성(내적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예의 대가나 동북아시아의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여백의 미학에 대해서도 서구의 지식인들은 잘 알고 있기때문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의 문화는 각기 그나름의 방식으로 전세계의 예술가들을 매료시켜왔다.
그러나 한국에는 중국문화와는 다른 맥락에서 태동한 한국 고유의 미술사조가 있다. 사람들은 이 미술사조를 “민화”라고 부른다. 민화는 다른 표현으로 “민초의 예술“ (그렇다고 반드시 민속예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민화“는 한국민족의 가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가장 토속적인 예술이다. 그 때문에 민화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있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민화창작의 예술가들은 대단히 예술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지만, 대부분 익명으로 남아있다. 그들은 대개 18-19 세기의 귀족들의 집을 장식해 주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그동안 민화는 예술작품으로서 한국에서 뿐만아니라 외국에서도 유명해졌으며, 그 독특한 영감과 고도로 발달한 구성을 통해 수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민화의 주제는 다양하며, 환상적인 요소로 가득차 있다. 민화에는 유머스럽고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순진무구한 시학들이 가득 차 있다. 구름과 같은 모습의 용, 유머스러우면서도 미소를 짓고 있는 호랑이, 혹은 복을 빌어주는 한문글귀, 이 한문글귀는 종종 천재화가가 추상적이며 초현실적 구성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나는 화가 함섭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놀랄만한 변화발전을 관심을 갖고 주의깊게 관찰해 왔는바, 종종 함섭 작품의 예술적 토대가 무엇일까 궁금해 한다. 물론 대단히 창조적인 예술가의 내적 동기는 항시 비밀스럽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함섭의 작품이 앞에서 언급한 “민화“와의 내적 연관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나름의 고유한 방식을 통해 지금의 예술형식으로 발전했다고 확신한다. 함섭의 그림에서 이러한 내적연관성은 현실을 뛰어넘는, 즉 예술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현실표현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함섭의 작품은 전통적인 예술형식과 내용, 그리고 표현기법에 의존하지않는 함섭 나름의 고유한 예술형태라 할수 있다. 그러면서도 예술가의 영감은 자신이 몸답고 있는 고유한 문화를 통해 풍성해질 수 있는 것이다.
탐구하는 시선으로 함섭은 때때로 근심스럽게 작품이 발전해 나가는 상태를 주의깊게 따라간다. 자발적이고 원기왕성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자만 하지않고 자신의 제작방법과 그것에서 얻게될 회화적 효과에 대해 자문한다. “끊임없는 작업을 통해서만이 가장좋은 작품을 할수 있는것“ 이 아니냐고 내게 말한다. 특별히 성공적인 몇개의 작품앞에서 느끼는 그의 만족감이 작가자신을 자기도취에 빠지게 할 위험은 없다.

번역. 송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