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포월과 성숙에서 생성된 함섭의 회화

이름

엄기홍

필자는 지금 함섭의 작품에 대하여 평하고자한다. 그러나 전문 평론가들의 유려한 평문을 전제할 때 필자의 이 작업은 필시 지난한 과제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평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연구보고서 형식에 가까운 글이 될 것이다. 30여년을 가까이서 보아온 그의 예술적 태도에 대한 필자의 소회로부터 시작한다.

포월의 화가
근대미술은 19세기 초 낭만주의 미술에서 탄생했다. 이후 예술은 자체의 규율을 스스로 정하게 되면서 작가들은 자아의식이 고취되었고, 스스로의 존재를 세계존재의 기준으로 봄으로써 절대적인 이상이나 초월(超越)을 꿈꾸게 된다. 이와 같은 낭만주의적 예술관에서 배양된 초월을 향한 꿈은 현재 까지도 지속되고 있지만 특히 오늘날 수백만 관중을 일시에 끌어 모으는 영상이미지의 스타나 유명 스포츠 스타들의 스펙타클한 이미지와 함께 대중문화에서 피크를 이루어지는 듯하다. 그러나 중용 감각이 빼어난 이시대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진석은 인터넷과 텔레컴뮤니케이션과 같은 디지털매체의 발달에 따른 새로운 유목성 시대에 오히려 유목성이 가져올 새로운 정착성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강조하고 있다. 그의 새로운 정착성이란 개념은 “과거의 정착성이 이동성과 반대되는 소극적 현상인데 반해 새 정착성은 매우 느린데도 보통보다 더 빠른 상태”를 뜻한다. 그것은 정착성시대에 꿈꾸던 초월적 이동성에 대하여 오히려 포월(匍越)의 이동성으로부터 나타난다.

“기어가기. 그냥 오랫동안, 한평생 [....] 기어가기. 열심히 기다보니 어느새 넘어가 있음을 깨닫게 되기[....] 머물러 있는 듯한데도 어느 아득한 경계를 넘어가 있음을 깨닫기 [....] 앞으로 또는 위로 별로 나아가지 않은 것 같은 데도 어느새 넘었고 넘었음을 알기. 포월”.1)

이와 같은 포월에 대한 정의 아닌 정의를 근거로 할 때 우리는 함섭을 포월적 작가라고 부르는데 망서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마치 한국미술에서 하나의 신화인 박수근이 평생 포월적 삶과 예술작업으로 어느 아득한 경계를 넘었듯이 함섭의 삶과 예술 역시 그와 같은 범주에서 그의 위상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는 부지런하다. 예술가가 부지런하다면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부지런하다. 그와 많은 모임들을 가져 봤지만 필자는 그의 빠짐은 물론 단 한번의 늦음을 본적이 없고 작업에서도 게으름을 피운 때를 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사실 그는 부지런하기보다 끈질기다. 작품을 하다보면 슬럼프도 있게 마련이고 반복되는 작업 가운데 일탈 행위도 있으련마는 그는 어김없이 아침 아홉시면 작업실에 나와 그 지루한 한지섬유와의 싸움을 오늘도 계속한다. 그는 끈기의 작가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지적했던 대로 오늘날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원본성과 같은 예술적 아우라가 사멸한 위에서 태어난다. 대신 언제부터인가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예술에 대해 현란한 메타언어를 구사하거나 일상으로부터의 초월의 제스춰을 과시함으로써 예술가 자신이 하나의 신화가 되어 자신의 주변에 아우라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아우라는 존재론적이기 보다 하나의 스펙터클의 효과로 현상함으로써 많은 예술가들이 과거 못지않은 아우라의 덕을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함섭에게는 그 같은 성스러운 아우라가 없다. 그는 초월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들뢰즈나 김진석이 포월론을 말하기 훨씬 전부터 그는 다만 포월을 꿈꾸었기 때문에 그의 끈기가 가능할 것이다. 함섭이 쌓아온 그간의 현란한 작품경력에 비추어보면 그는 이미 초월적 경지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그는 초월을 모른다. 그의 생리대로 오늘도 끈기 있게 포월 할 뿐이다.

초월적 예술에는 초월이 땅에 대립되는 수직적 시각개념인 만큼 일종의 피라미드 구도의 정점을 보는 것과 같은 절대적이고도 위계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그 위계의 정당성은 천재성이나 예술성 혹은 철학과 같은 거대담론이 보증한다. 그러나 포월은 “천재는 죽었다”2)고 외칠 수 있는 이 시대의 일상적 인간 존재로부터 비롯한 개념이라고 할 때, 그 예술이란 일종의 수평적인 시각의 산물인 만큼 ‘풍경’과 같은 멋 아닌 멋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포월을 폄하하면 안 된다. 위계로 얼러붙은 초월의 예술에는 움직이면 추락할 수밖에 없는 아찔한 정상만이 있지만 이 ‘눈먼’ 예술의 풍경 속에는 의심에 찬 눈을 대신하여 정염의 몸들이 서로 부딪치면서 늘 향연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머리나 논리 보다는 몸이나 수행성(performativity)에 주목하는 후기현대미술의 길은 포월의 길과 나란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소 장황하지만 들뢰즈의 노마돌로지를 빌려보자.

당신은 온갖 방법으로 그것을 하나(혹은 여러 개)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미리 존재하거나 완전히 만들어 진 채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 그것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수련이며 하나의 불가피한 실험이다. 그것은 당신이 그 실험을 도모하는 순간 이미 만들어져 있지만 당신이 그 실험을 도모하지 않는 한 그것은 만들어져 있지 않다.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당신은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 혹은 그것은 끔찍할 수도 있다. 당신이 죽을 지도 모르니까. 그것은 욕망일 뿐 아니라 비-욕망이다. 그것은 결코 notion, concept이 아니며 차라리 실천, 실천들의 집합이다. [......] 그것은 하나의 극한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CsO3)가 뭐지?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것 위에 있으며 벌레처럼 그 위를 기어 다니거나 장님처럼 더듬거리거나 미친 사람처럼, 사막 여행자나 초원의 유목민처럼 달린다.”4)

엄기홍 (미술학 박사, 청주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