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 미술의 정체성을 찾아서 - 함섭 회화 40년사의 얼굴 -

이름

김 복 영 (미술평론가⋅서울예대 석좌교수)

1
함섭이 지난 해 이래 제작한 작품들로 근작전을 갖는다 하여 새로 지은 작업실을 볼 겸 겨울추위가 아직 완연하던 2월 하순, 그의 새 거소가 있는 춘성군의 산자락을 찾았다. 그의 나이 어느덧 고희를 맞았으니 그의 화론 또한 연륜의 나이테를 거듭한 모습을 현장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근작들을 둘러본 필자에게 그가 담담하게 건넨 말 한마디는 그림의 ‘바탕’이었다. 한자 표현으로 해서 ‘회사후소’繪事後素다. 그림이 배후에 두어야할 근본 내지는 바탕이 무어냐다. 그는 이렇게 화두를 꺼냈다.

흑백 인화지가 백색 그 자체를 한껏 뿜어내듯이 한지화 또한 한지의 맛을 마냥 뿜어내야 해요! 바탕의 느낌이 중요해요! ‘한지화’라는 장르가 시작된지 이제 반세기에 이르렀고 작가 또한 4백 명에 육박했으니 한지화를 자기화할 때지요. 한지를 서양식이 아니라 한지식式으로 고집할 필요가 있어요!

그가 네덜란드, 홍콩으로 그자신의 성과를 알리려 정열적으로 진출하던 시절, 그의 도록「서문」(2001)을 쓴지 십 여년만에 듣는 말이다. 평자는 이번에 쓰는 함섭론의 화두를 그의 ‘바탕론’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한다. 그가 평생 일구어온 그림의 ‘바탕’이 어떠한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이제사 좀 더 명징하게 드러냈으면 한다.
작가가 말하는 ‘바탕’이란 일반적인 말로는 여러 가지 뜻을 갖는다. 적어도 네 가지다. ‘한바탕 놀았다’고 할 때와 같이 행동의 시간적 거리를 나타내기도 하고, ‘바탕이 좋아야 한다’고 할 때처럼, 사람이나 물건이 애초부터 갖고 있는 배경이나 품질을 뜻하는가 하면, 때로는 장소를 아우르는 일터, 마당, 자리를 뜻하기도 한다. 이와 비슷하게 바탕에 해당하는 한자어인 ‘후소’後素의 ‘소’素 또한 여러가지 뜻이 있다. ‘흰 것’白也, ‘본연’本也, ‘사물의 질박성’物朴也, 비워져 있거나空也, 무색성無色也을 나타내는 등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무엇을 ‘소’로 할 건지를 생각할 때 우리가 참고해야 할 품목들이 아닐 수 없다.
한 마디로, 바탕은 일체 만물의 근본이자 토대다. 만상이 여기서 유래하고 존재하고 성장하는 근거다. 나아가 시간과 역사를 빌려 작동하는 인간사의 근원이다. 이렇게 심오한 뜻을 갖는 바탕을 회화에서 찾자는 게 애초 중국화론의 ‘회사후소’였다. 이 말을 우리 회화로 되돌려 생각하면 미묘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우선 생각할 건 이렇다. 함섭이 말하고자 하는 ‘바탕’은 좁은 의미의 그린버그 유형의 ‘지지체’支持体 support가 결코 아니라는 거다. 2차원 평면이거나 3차원 입체와 같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질료적 바탕을 뜻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함섭은 처음부터 모더니스트가 아니었다고 할 것이다. 그가 바탕을 우리의 ‘얼’ 내지는 ‘정체성’과 결부지어 언급하고 있는 걸 보아서도 그렇다. 필자에게 박수근의 회화를 말하면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탕은 우선 사람과 나무, 소와 아이들을 담아내는, 형상들 저 너머의 불특정한 원천을 말하려는 데 뜻이 있었다. 사물과 이것들의 형상 이전에 앞서 있어야 할 그 무엇이라는 거였다. 형상들을 생성해내는 동력으로서의 바탕을 강조하였다. 게다가 개인적이면서 민족적이고 역사적이고 총체적인 의미에서 시간적으로 이해되는 그 무엇으로 이해하였다. 공간적 질료를 바탕으로 하는 건 일차적인 것일 뿐, 이를 아우르면서 드러내는 총체적 현전의 원인으로서의 바탕을 그는 강조하였다.


2
그는 일찍이 1980년대 모색 시대의 작품 <분합分合>, <창호>에서 후일의 ‘바탕’이 될 일련의 실험을 시작했고 1990년대 전후기의 <신명>을 통해서는 자신의 전생애를 감당할 바탕을 꾸준히 궁구했다. 특히 1990년 부터는 우리의 전통 제례의식, 이를테면 ‘민속’, ‘고분’, ‘수호신’, ‘굿놀이’ 등 민족적 전통이나 잠재의식을 향한 몸짓과 놀이 개념으로서 바탕에 접근하였다. 한지를 찢고, 긋고, 두들기는 작위를 빌려 바탕행위를 추진한 게 여기서 연유했다.
1990년대 후반에서 현재에 이르는 은 그 구체적인 모습이자 절정이다. 이 명제의 근작들은 대체로 한자의 필선을 구사함에 있어 상모놀이에서처럼 돌리고 뿌리는 드로잉체계를 보여준다. 화면을 분할하는 게 아니라, 경계들 간의 암묵적 침투와 연계성을 강조한다. 윤무하는 몸짓과 선조線條들이 한옥 벽면의 균열과 닥종이의 중첩을 빌려 경계를 넘나드는 자태를 부각시킨다. 대비를 강조하면서 오방색조의 병치와 중첩 위에 비상하는 흑조와 일월성신, 단청이나 청사초롱, 삼태극의 동세가 한지의 어우러짐의 틈새를 가로지르는 화법을 구사한다.
근자의 이러한 시도는 1960~70년대 그의 모색시대를 상기시킨다. 초기 시절의 <보고싶은 것들>, <분합>과 같이 산업사회화로 진입하면서 잊혀지기 시작한 초가와 과거의 심혼을 화면의 이면에서 전면으로 부각시키려 했던 게 지금도 하나의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초가지붕이나 한옥의 창호窓戶를 소재로 한지를 뒤에서 앞으로 밀어 이미지의 울림을 현전現前시키는 방식이 이 시절 바탕창출의 원본이 되고 있다. 당시를 그는 회고하면서 ‘그저 종이와 나 자신이 하나의 캔버스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외에는 내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안으로 스미고 배어들어 한지의 내면을 소유했으면 한다’고 하였던 게 방법적으로 세련되고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그의 정착기를 알리는 1980년대와 전개기에 해당하는 1990년대의 바탕실험은 저채도의 무색조에서 점차 고채도의 유색조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대체로는 침묵의 시공간을 발현시키기 위해 반복적으로 덧칠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었다. 화면은 은은하게 바래지고 반투명해져 창살 너머의 그림자 같은 바깥세계를 반영하는 듯 했다. 이를 위해 긁어 지우는 방법과 덮어 지우는 방법을 병행했던 것도 또한 오늘 날 바탕미학의 기초가 되고 있다.
1990년대의 <신명>과 근자의 <신명>은 선후의 차이를 보이면서 좀 더 완벽해진 수준에서 ‘한지와 작가 자신의 만남’을 시도하려는 의지를 뚜렷이 부각시킨다. 전기가 ‘시간과 공간의 저쪽에서 들려오는 걸 방안에 앉아서 심안으로 느끼는’ 바탕을 창출했다면, 지금은, 이를테면 판소리 한마당이나 남사당패, 산대놀이의 한마당에서와 같은 신명나는 놀이마당을 연출한다. 여백과 선이 뚜렷하고 간헐적으로 화면에 묻어 있는 서체는 물론, 민화나 오방색이 현란한 전통굿 차례상 싸리문 시골돌담 서낭당 보름달과 강강술래, 나아가서는 국악과 춤이 어우러지는 놀이 한마당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이 모두가 닥종이와 오방 컬러를 배경에 두고 이루어지는 바탕창출의 요체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작업에서 일련의 색과 면, 그리고 선들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고향의 풍요다. 각 방위의 상징이자 수호의 표시인 오방색은 내 작품에서 필수적인 요소다. 이렇게 내 삶과 작품은 한결같이 한국적 정신에 입각한 작품이 되었다. 흥에 겨워 던지고 찢고 두드리는 행위 자체도 그렇고, 한지라는 재료도 그렇다. [ ... ] 한국적 정체성, 그 심층구조를 논할 때, 오색이 나부끼는 서낭당의 모습이나 절이나 암자의 원색문양, 색동저고리, 치마를 입고 하늘을 나르는 그네타는 모습, 널뛰는 모습, 떡판의 오묘한 문양, 이것들에서 근거를 찾았다.
[ ... ] 닥종이의 재료인 닥나무 껍질 전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것을 이겨 화면에 던져 붙이기 시작했다. 한지를 물에 적신 후 찢거나 두드리고 짓이겨 다시 화면에 재구성하는 과정을 반복하였다. 던지고 두드리고 찢고 짓이기는 작업은 마치 행위미술 같기도 할뿐더러, 타악연주 같기도 한, 독특한 나만의 방법이 도출되었다. 우리나라 전통무용, 북이나 꽹가리, 사물놀이와 같은 맥락일수도 있고 굿판의 원색 깃발 같은 것도 내 작품에선 일맥상통한다.
[ ... ] 앞에서도 말한 내 작품의 바탕은 바로 이러한 민족 얼의 표출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평생을 한국적 정체성을 찾는 데 목표를 두고 작업해왔던 것이 여기에서 연유한다(근작 <작업노트>).


3
그가 창출하는 ‘바탕’은 이렇게 해서 ‘한지와 오색의 얼’이 만들어내는 한마당이다. 우리 판소리의 ‘판’같은 거다. 그의 바탕담론은 우리의 전통가락의 또다른 이름으로서 등장한다. 그의 바탕이론을 일컬어 필자는 ‘풍류風流에 기반한 아우름의 몸짓’으로 요약한다. 이 말은 필자가 그를 지켜본 40여년의 풍상의 세월을 요약한 말이나, 정확히는 우리의 유구한 문화형질을 이름하는 말이기도 하다.
먼저 ‘풍류’는 신라 진흥왕조 이래 이두吏讀 문자로 전래되어온 우리 문화의 뿌리정신의 이름이다. ‘밝음’光明을 뜻하는 이두어의 이름이지만 그 이전 삼한시대를 전후로 발전해온 면면한 정신이다. 환하다는 뜻의 ‘환’桓과 박달나무의 ‘밝’을 뜻하는 ‘단’檀과 함께 전수되어온, 잊혀진 옛 정신의 이름이다. 이 정신은 제천祭天의식이나 세시풍속을 통해서는 ‘노래하고 즐거워함으로써 서로 간에 희락을 나누는 것’相悅以歌樂이 목적이지만, 이 보다는 일찍이 ‘신인합일’神人合一을 꿈꾸었던, 이른 바 태고시절 민족의 일체감을 기원했던 나라차원의 이름이었다.
오늘의 시선으로 보자면 풍류는 일체를 하나로 아우름으로써 세상을 구원하고, 이 일환으로 예술을 통해서 구원久遠에 도달하려는 행위를 뜻한다. 풍류는 어느 덧 우리의 세계관 속에 깊이 내재함으로써 무의식 안에 구조화되어 있는 동력이다. 심층에 내재해 있기에 민족의 얼이고 뿌리가 되었다. 이게 오늘날 ‘신명神明’이라는 ‘놀이’ 의식으로 살아남아 전래되고 있지만, 신명 이전에 ‘풍류’가 우리의 진본眞本이다.
풍류가 20여년의 긴 세월 함섭의 작품 <신명>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건 경하할 일이다. 무엇보다 그가 한지와 오색으로 우리의 유구한 문화맥락을 현재화하기 위해 ‘한지화畵’를 구축하려 한 것은 참으로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그의 예술이 우리의 풍류적 아우름에 겨냥한 건 천운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싶다. 모두가 서구로 시선을 돌렸는데도 말이다.
함섭의 회화 40년의 밑바닥에 흐르는 풍류이자 아우름은 일찍이 8세기 이후 원효의 화엄철학, 석굴사의 원륭圓融적 축성에서 시작해서 중세와 근세의 불교, 유교의 세례를 물리치고 지금까지 면면히 흘러와 한 작가의 의식적 저변을 이루고 있다. 비록 겉으로는 유불선儒佛仙 사상이 지배했을 지라도 안으로는 우리의 원류문화의 중심사상으로 무의식에 내재해 끈끈한 맥락을 잇고 있다.
함섭의 아우름의 기법은 화면의 표면과 이면을 하나의 바탕으로 해서 아우르는, 요컨대 전후를 포용하려는 우리의 사상적 원류를 재확인시킨다. ‘다만 종이와 나 자신이 하나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이외는 나의 일체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안으로 스미고 배어들어 그 안을 소유하기를 기대한다’는 앞서의 언급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에게서 ‘바탕’은 그 자신마져 화면에서 지워버리는, 요컨대 화면의 안과 밖을 만남의 끈으로 잇는 장소로서 바탕이다. 그가 그리는 바탕은 우리의 전통 언어로는 ‘마당’이다. 마당이기에 작가 또한 한마당 안에 존재하고 사물과 더불어 있게 된다. 일체의 것과 하나로 존재할 따름이다. 그의 오색과 한지가 벌이는 표정이 이를 명징시킨다.
그가 고희를 맞아 벌이는 근작전은 그 절정이다. 그의 근작전들은 우리에게서 그림의 바탕이란 무엇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범이라 할 것이다.

2011, 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