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한지의 물성과 조형화 - 함섭의 작품에 대하여 -

이름

오 광수 (미술평론가, 한솔뮤지엄 관장)

함섭의 한지작업은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욱 알려진 편이다. 국내활동보다 해외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졌다는 데도 요인이 있지만, 그의 작업 자체가 일반적 문맥의 회화의 범주를 넘어선 독특한 영역의 창안에 대한 경이로움의 반영에 기인된 것이라 본다.
해외 아트페어에 출품될 때마다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뉴스를 접할 때, 그것은 단순한 방법상의 새로운 매체의 사용에 대한 것이기 보다 한국 문화의 저 깊은 영역에 가 닿는 실로 정신의 구현에 대한 감탄과 찬사에 다름아니라 생각되었다.
작품이기에 앞서 한국의 오랜 민족적 정서의 내면을 현대적 방법으로 새롭게 구현해 보이는 놀라운 정체성에의 탐구에 대한 경이로서 말이다.


한지를 매체로 한 작업, 현대적 조형방법으로서의 추구는 80년대로 소급된다. 일부 현대 작가들에 의한 한지의 매체로서의 발견은 혹은 개인적인 영역에서, 혹은 집단적인 의식의 결집 속에서 진행되었다.
단순한 지지체(바탕)로서의 워크 온 페이퍼가 유행하는 한편, 한지의 질료가 지닌 조형적 가능성을 더욱 탐구하는 실험의 추세 속에서 한지에 대한 관심은 더욱 폭 넓은 것이 될 수 있었다.
한지의 물성에 대한 관심의 증대는 닥에서 종이로의 조성과정을 작업의 프로세스로 발전시키는가 하면, 전통적인 생활 공간 속에서의 한지가 지닌 정서의 내면을 조형화 할려는 경향으로도 나타난다.
함섭의 작업은 후자에 속한다 할 수 있다.


한국인의 생활공간 - 적어도 전통적인 생활공간 - 은 한지로 에워싸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지로 에워싸인 방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생활하다 죽어간 한국인의 삶은 그 어떤 물질보다도 한지의 매체로 절여진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단순한 물질로서의 매체라기 보다 정서로 순화된 그 무엇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인의 숨결이, 눈물과 땀이 베이고 얼룩진, 저 내밀한 시간의 흔적을 쫓는 일을 단순한 물질에 의한 표상작업으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정서의 구현이 아니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함섭의 화면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성의 진행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끊임없이 지워지는 안타까움을 동반한다. 과거와 현재가 서로 뒤엉키고, 서로 밀어내고, 서로 끌어 당긴다. 이 무수한 혼융(카오스) 속에 그의 작업은 비로소 살아있는 생명현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의 화면이 더 없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살아있는 현상으로서의 정감 때문일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기억 속에 명멸하는 이미지의 파편들이 되살아나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된 사물함을 열었을 때, 그것도 어머니나 누나가 사용하였던 바느질 도구들이 들어있는 함지를 열었을 때, 낯익은, 그러나 이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시간의 저 편에서 손짓하는 그리움이 아련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잔치마당, 웅성되는 사람들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만남이 주는 여유로움. 가을날 타작마당의 풍성함이 안겨주는 가슴 뿌듯한 순간들, 오래된 고서의 책갈피를 열었을 때 나는 근접할 수 없는 내음, 동구에 서 있는 장승, 늙어가는 장승이 내뿜는 세월의 무게, 그의 화면은 우리들을 무한한 시간의 저편으로 이끌어간다.


그의 화면은 단순한 지지체로서의 한지가 아니다.바탕과 그 위에 가해지는 행위의 흔적들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구조이다. 지지체 위에 가해지는 닥 껍질, 천, 실의 콜라쥬, 여기에 가해지는 오방색들.
찢어진 닥 껍질과 이물질들이 어우러지면서 스스로 생성하는 현상의 장이라고나 할까.
그러면서도 이것들은 완결된 것은 아니다.
완성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결정되지 않은 현전에 머문다. 완결되기보다 생성되는 순간, 그 순간에 있기를 갈망한다. 문자와 기호와 선조의 자유로운
직조가 서로의 존재를 부각시키면서 전체로서의 조형, 스스로 존재하기를 기원한다.
실로 그의 화면이 살아 숨쉰다는 것은 존재로서의
현현에 기인되기 때문일 것이다.


오 광수
(미술평론가, 한솔뮤지엄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