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生成의 氣을 可視化하는 열려진 조형세계

이름

임두빈 (미술평론가 / 한국미학미술사연구소장)

글을 쓰면서 나는 함섭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다. 연구실의 흰 벽면 한가운데 걸린 함섭의 그림은 그 독특한 기운으로 벽면을 지배하며 실내 공간에 넉넉하고 포근한 시각적 울림을 전달하고 있다. 책상과 의자와 찻잔과 수석과 책들과 작은 기물들 까지도 그의 그림에서 번져 나오는 기운에 의해 한결 따듯한 심리적 정조를 얻고 있다. 심지어 그 기운은 다른 그림들과도 반발하거나 충돌하는 일 없이 자연스런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함섭의 그림에 흐르는 이 독특한 기운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특히 서양인들이 그의 작품에 매료되고 있는 이유도 이 독특한 기운 때문이 아닐까?
형상(形象)이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어떤 분위기는 그 형성이 지닌 하나의 기(氣)라고 할할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그 나름의≪氣≫ 를 지닌다. 조선시대 초기의 철학자 화담(화담) 서경덕(서경덕)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태허(太虛)는 맑고 어떠한 형질도 없는 것으로 이것을 선천(先天)이라 한다. 그 크기는 바깥이 없고 그 시초는 처음이 없다. …그 맑고 허정(虛靜)함이 기(氣)의 본원이다. ≪氣≫는 바깥이 없는 먼데까지 가득 차 있어一毫라도 용납할 빈틈이 없다. 그런데 ≪氣≫는 움키려고 하면 허(虛)하고 잡으려고 하면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허하고 없음에 참이 있으므로 이것을 무(無)라 할 수는 없다. 이 경지에 이르면 소리가 없어 귀로 들을 수도 없고 냄새가 없기에 코로 맡을 수도 없다. 과거 뭇 성인들도 한 마디 말씀이 없었던 것이고, 주염계(周溪)나 장횡거도 말한 적이 없는 것이다. …이에 과거 성현의 말씀에서 찾아보면 주역의「寂然不動」이요 중용의「誠者自成」이다. 그 깨끗한 본질은 하나의 기운이요, 그 혼연한 둘레는 태일(太一)이다. 주염계도 어찌할 수 없이 다만「無極而太極」이라고 했다. 참으로 기이하지 않은가? 기이하고도 기이하다. 참으로 묘하지 않은가? 묘하고도 묘하도다.(花潭集,原理氣)"
화담선생은 공간적으로나 시각적으로 무한한 것이 우주의 본체라고 하고 그 안은 기(氣)로 충만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는 신묘한 우주적 생명력이다. 기는 소리도 냄새도 형체도 없이 잡을 수도 없으나 무(無)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기≫는 만물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사람 역시 ≪기≫의 소산이며, 그 사람에 의해 그려진 그림은 그림을 그린 사람이 지닌 ≪기≫의 반영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화가가 깊은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 화가가 독특한 ≪기≫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 이외의 존재자(存在者)들과 서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즉 서로서로 지니고 있는 ≪기≫를 발산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에게서도 ≪기≫의 상호 소통이 이루어지고, 자연과 환경에서도 ≪기≫의 상호 소통이 이루어지며, 사물에서도 ≪기≫의 상호 소통이 이루어진다. ≪기(氣)≫에는 맑고 좋은 기가 있는가 하면, 탁한 기도 있다. 원래 선천(先天)의 기(氣)는 맑은 것이나. 만물이 형성되면서 나타나는 기(氣)에는 차별이 있다. 이로 인해 인간도 탁한 ≪기≫를 타고 나는 사람이 있고 맑은≪기≫를 타고 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이 어려서부터 좋은 ≪기≫에 의해 둘러싸여 영향을 받고 자란 자란다면 그는 참으로 좋은 품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란 그래서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自然)도 중요하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도 중요하다. 모두가 ≪기≫의 상호 소통이 이루어지는 존재자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쌓아올린 문명은 자연파괴와 비인간화(非人間化)를 초래하면서 우리에게 부정적인 탁한 기운을 널리 유포시키고 있다 사회가 맑고 좋은 기운을 생성시키지 못한다면, 그 사회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맑은 기운으로 충만한 사회, 참으로 우리가 희구해야 할 이상적(理想的)인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예술은 사회에 좋은 기운을 유포시킬 수 있는 중요한 매체의 하나이다. 그러나 지금의 예술이 얼마나 그러한 역할을 해주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무기력한 사회의 반영물로서의 역할밖에 못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작품들을 우리는 보고 있다.
합섭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좋은 기운을 전달해 주고 있는 드문 예(例)의 하나이다. 그가 그린 형상과 그가 사용한 재료들은 고향의 푸근한 정서와 그 땅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하나의 예술작품이 지닌 이미지는 영혼의 움직임을 담은 마법처럼 독특한 기운으로 우리를 감싸 안는다. 한 획의 선(線)이나 점(點)의 표정 속에서도 작가가 지닌 독특한 생명의 숨결이 살아 있기 마련이다.
합섭의 그은 화면 위의 선에는 고도로 숙달된 화가의 ≪기≫가 어려 있다. 사실 그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선은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다. 그는 다양한 색깔의 한지를 특정한 작용을 가하여 화면에 붙여나가는 것으로 선(線)을 만드는 것이다. 함섭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선에는 우연적인 요소와 필연적인 요소가 함께 썩여 있다. 즉 무의식적(無意識的)요소와 의식적(意識的)요소가 함께 작용하여 선(線)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에 의해 만들어진 화면 위의 선(선)은 세계에 대한 심리학적 질서체계의 소우주(小宇宙)이다. 아무나 선(線)을 긋는다고 다 제대로 된 선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화가가 자유롭게 그어나간 선(線)하나에서도 그 화가가 지닌 역량의 상한 부분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화면 위에 그어진 선(線)은 불가사의(不可思議)할 정도로 화가에 따라 다른 풍부한 울림의 진폭을 지니고 있다. 졸렬한 선은 그림의 모든 것을 마쳐버리지만, 고도의 경지에 오른 탈속한 선(線)은 그 것 만으로도 마음을 정화시키는 깊은 기쁨을 준다. 함섭의 그림에 등장하는 부정형(不定形)한 선(線)들은 자유롭게 보는 이의 심리적 공간(心理的 空間)속을 부유(浮游)하며, 우리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잠재한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 대지의 풍요로운 기운에 대한 향수를 새삼 되살려 올리고 있는 것이다.

함섭의 선(線)은 면적(面積) 특성을 지닌 자유로운 선이다. 이 선(線)들에 그는 전통적인 오방색(五方色)을 기조(基調)로 한 다양한 색채의 울림을 부여하고 있다. 각 방위의 상징이자 수호의 상징인 오방색은 그의 그림에서 생명의 기운을 보호하며 신장시키는 시각적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다. 원래 오방색은 동양의 천문방위관에서 연원하는 색들로써 다양한 존재자들과 연관되어 벽사수호적인 의미로 생각되어 온 색들이다.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나온다. “동방은(木)으로 그 곳을 맡은 황제는 태호(太)이며 그 보좌역은 구망(句芒)으로 규(規)를 잡고 봄을 다스린다. 그 곳의 신(神)은 세성(歲星)이고 거기에 속하는 짐승은 청룡(靑龍)이다. …나방은 화(火)인데 그 곳의 황제는 염제(炎帝)이며 그 보좌역은 주명(朱明)으로 형(衡)을 잡고 여름을 다스린다. 그곳의 신(神)은 형혹(熒惑)이고 거기에 속하는 짐승은 주작(朱雀)이다. …중앙은 토(土)로 그 곳의 황제는 황제(黃帝)이며 그 보좌역은 후토(后土)로 승(繩)을 잡고 사방을 다스린다. 그 곳의 신(神)은 진성(鎭星)이고 거기에 속하는 짐승은 황룡(黃龍)이다. …서방은 금(金)으로 그 곳의 황제는 소호(小昊)이며 그 보좌역은 욕수(蓐收)로 구(矩)를 잡고 가을을 다스린다. 그 곳의 신은 태백(太白)이고 거기에 속하는 짐승은 백호(白虎)이다. …북방은 수(水)인데 그 곳의 황제는 전욱(顓頊)이며 그 보좌역은 현명(玄冥)으로 권(權)을 잡고 겨울을 다스린다. 그 곳의 신은 진성(辰星)이고 거기에 속하는 짐승은 현무(玄武)이다.” 여기에 써 있는 청룡(靑龍), 주작(朱雀), 백호(白虎), 황룡(黃龍), 현무(玄武), 등의 5마리 상징동물은 황룡만 빼고 모두 고분벽화에 그려졌던 신성한 사신도(四神圖)의 동물들이다. 잡된 기운,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한 벽사수호의 의미를 지닌 상징 동물들인 것이다. 사실 황룡까지 포함한다면 오신도(五神圖)라고 말해야 했겠지만 중앙의 방위는 생략된 채 사신도만 언급되어 왔다. 그런데 이들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동물들의 이름에는 각기 그 것을 나타내는 색채상징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오방색의 벽사수호적 주설성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함섭은 오방색의 벽사수호적 기운을 그의 작품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의 재료가 지닌 전통적 특성과 그가 시도한 투박한 마티에르 효과는 이러한 결합을매우 자연스럽게 느끼게 한다.
청(靑), 백(白), 적(赤), 흑(黑), 황(黃)의 오방색(五方色)을 기조로 한 그의 작품의 색채기운은 자유로운 선(線)의 울림과 일체화 되어 기묘한 시각적 진동을 일으키고 있다. 이와 같은 효과는 차가운 과학적 색채분석에 의해 제대로 밝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함섭이라는 작가 개인의 한국적 전통에 뿌리박고 있는 고유한 생래적(生來的) 정서가 깊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색채는 마티스가 사용한 색채도 아니고, 칸딘스키가 사용한 색채도 아니며, 몬드리안이 사용한 것과 같은 색채도 아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색채는 한지(韓紙)라는 특수한 매체와 의도적으로 조성된 화면의 마티에르와 그의 생래적 정서가 혼연일체 되어 나타난 개성적인 색채인 것이다. 감각적 표피성을 거부하는 듯한 함섭의 색채는 가시적인 것과 함리적인 것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불가사의한 어떤 정조를 환기 시키고 있다. 겉으로 들어나지 않은 기(氣)의 진동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함섭의 그림에서 그 어떤 사실적인 형상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보고 있다. 그의 선묘는 외부 대상을 드러내거나 지시하기 위한 수단이 그 자체가 자족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그의 화면에서 부정형(不定形)한 색선(色線)들은 길거나 짤게 그리고 휘어지거나 갈라지면서 바탕 공간에 특정한 위치를 부여받고 상호 조응하면서 배치된다. 다양한 모양의 굵거나 가는, 그리고 길고 짧은 색선들의 움직임은 결코 사실적인 대상물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화면 공간을 생성(生成)의 기(氣)로 가득 채우며 살아 있게 만들고 있다. 흔히들 그의 그림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작품으로 생각한다. 추상적인 작품에 「사실적」이란 말은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용어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사실(寫實)」이란 말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거짓없이 그려낸다는 듯이다. 그런데 대상이 지닌 있는 그대로의 거짓 없는 모습은 그 대상의 껍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대상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이다. 껍데기는 우리를 기만하기 일쑤이지만 내면의 모습은 그럴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대상의 외형을 그대로 묘사한다고 하는 소위 사실주의적인 미술이 진정으로 사실적일 수 있는 것일까 희의하게 된다.
함섭의 그림은 자연의 외형을 그려내는 그림이 아니라, 가시적인 사물들의 존재 근거가 되고 있는 생성의 ≪기(氣)≫를 드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구체적인 대상으로 형상화 되기 이전의「생성의 기운」을 드러내기 이해 추상적인 조형어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의 작품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사실적 접근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함섭이 구사하고 있는 색(色)과 선(線)과 다양한 흔적들은 결코 형태를 단정짓는 법이 없다. 그의 작품에서 형태는 항상 풍부한 상상을 유발시키는 가능태(可能態)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동(動)과 정(靜), 실(實)과 허(虛)가 음양(陰陽)의 내재적(內在的) 법칙에 의해 자연스러운 하나의 소우주(小宇宙)를 탄생 시키고 있는 것을 본다. 생성(生成)의 기운인 우주적(宇宙的) 기(氣)를 담지(擔持)한 열려진 형태, 함섭의 작품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넉넉하고 푸근한 기운은 여기에서 유래한다.